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선조에 대한 평가 ===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 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하여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 >후퇴해 나올 때, 견내량(見乃梁)에 이르기 전에 고성에서 적병을 만나 이와 같이 패배를 당했단 말인가? 저쪽을 경유하였다면 한산으로 쉽게 퇴진하였을 것인데 이곳을 경유하여 패배를 당하였는가? >(중략) >[[정신승리|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세 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na_13007022_003|#]] 칠천량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충격을 받았고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이다. 쉽게 말해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본인이 언급했듯 퇴로만 잘 확보하고 경계라도 잘했으면 이 정도로 불살라지는 참사는 없었다. 선조 본인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 순간 모든 조정 대신들은 원균의 무능력함을 깨닫고 할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이 원균에게 있다면 잘 싸우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 또한 책임이 있다. 물론 왕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할 신하는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의 위신이 깎인다. 그러니 원균에게 잘못이 없고 패전은 단지 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은근슬쩍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족으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승리를 거둔 이후 이를 "하늘이 도왔다.(此實天幸)"라고 평했는데, 두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음에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선조는 처음 패전 소식을 듣고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졌으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이다.' 라는 내용으로 말했다. 그런데 괜히 출동하여 적의 함정에 들어가지 말고 한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순신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순신이 빨리 출동 안 한다고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결국 백의종군에 처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꽂아넣은 책임자는 선조 자신이었다.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현실을 깨달은 선조는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하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제수했다. 이 부분을 김경진 소설 임진왜란에선 '임금이 신하에게 싹싹 비는' 상황이라고 서술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소리.[* 이순신은 당시 3년 모친상 중이었고 효가 나라의 근본인 조선에서 그런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불효를 저지르게 하는 것은 감히 왕조차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중에 고기를 하사하는 선조의 인성에도, 그 어머니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선조임에도 오직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 하나 만으로 전장에 기꺼이 다시 뛰어든 이순신을 어찌 성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선조의 속내야 안 봐도 뻔해서,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며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기색을 드러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하들이 여전히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라고 요구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승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이순신한테 내린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을 주어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그러니까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때에는 소장이 된 셈이다. 이러면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들과 같은 품계 즉 계급이 같으므로 지휘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휘하 수사들이 통제사 명령을 잘 따랐기에 이후 별 탈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배설은 도망, 김억추는 육군으로 전근 나간 이후 임명된 수사들이 [[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로 이 세 사람은 이전부터 이순신의 부장이자 최측근들이었다. 참고로 이순신이 받은 절충장군 품계는 명량해전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도 유지되었다. 이것도 선조가 쩔쩔매는 명나라 경리 양호, 제독 마귀 등이 이순신의 품계를 올리자고 강력히 주장하자 마지못해 올려준 것이고, 그나마도 원래의 정2품만큼은 절대로 주지 않고 이보다 1단계 낮은 종2품 가선대부로 해주었다. 원균이 제아무리 무능하다 한들 그동안의 전투 경험만으로도 이 전투는 무모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선조는 그동안 이순신한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현장 지휘관들의 합리적인 조언도 무시하고 되도 않는 명령만 내리고 불합리한 논리에 편승해 이순신을 내쫓았다가 그 논리에 묶여 원균에게 출정을 강행하게 만들어 조선 수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패전을 하자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함을 보였으며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고 기용하지 않으려다 신하들과 명군 지휘관들이 권고하자 마지못해 기용하며 여전히 지원을 해주지 않고 품계까지 깎아서 내리는 졸렬함까지 보였기에 선조가 원균 다음으로 큰 책임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